아래 그림을 보라. B와 C 중 A와 같은 것은 무엇인가?
EBS 다큐프라임 ‘동과 서’ 제작진은 동양인과 서양인의 서로 다른 인식 체계를 살피기 위한 실험을 설계했다. 나무로 된 원기둥 A를 보여준 다음, 플라스틱으로 된 원기둥 B와 나무 재질 사각기둥 C를 내밀고 이들 중 어느 것이 A와 같은가를 묻는 간단한 실험이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대체로 동양인은 C가, 서양인은 B가 A와 같다고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물음에 동양인은 C의 ‘질감’이나 ‘본질’이, 서양인은 B의 ‘모양’이 A와 같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 실험은 동양인과 서양인이 사물을 인식하는 차이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실험이 A를 B와 C 중 무엇과 묶을 것인가 하는 ‘분류’에 관한 문제를 낳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글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객관적이고 효율적이라고 간주되는 분류체계 속에는 어쩌면 동과 서만큼 좁히기 어려운 틈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트와 컬쳐
분류체계와 관련한 일은 최근 안티에그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록 음악 중에서도 하위 장르에 속한다는 ‘슈게이징’에 관한 글이 안티에그의 콘텐츠 카테고리 ‘아트’와 ‘컬쳐’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 하는 문제였다. 음악에 관한 글은 ‘컬쳐’로, 예술을 다루는 글은 ‘아트’로 분류한다는 안티에그의 콘텐츠 가이드라인 원칙이 충돌한 것이다. 이견은 총괄 디렉터와 콘텐츠 팀 리더 사이에서 일었다. 이 경우 글에서 다루는 중심 소재 자체가 음악이었으므로 최종적으로 두 사람은 이 글을 ‘컬쳐’로 분류하는 것에 합의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카테고리의 문제가 객관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명했다. ‘슈게이징’에 관한 글이 ‘아트’냐 ‘컬쳐’냐의 문제가 이 글의 관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척 치밀하고 촘촘한 가이드라인을 갖춘 안티에그의 콘텐츠 카테고리 분류에도 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딸기잼을 찾으려면
분류란 일종의 정리다. 정리하는 주체가 정리하려는 대상의 속성과 용도를 파악해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대상을 구분하는 행위다. 그런 점에서 정리는 인류 문명이 발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도 했다. 인간이 처음으로 행한 분류는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 자연에 질서를 부여한 일이다. 이때 분류는 생존의 문제였다. 태풍, 지진, 가뭄, 홍수 같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맞설 도리가 없는 자연과 공존하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것이 분류다. 자연의 속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인간의 관심에 따라 나눈 것이다. 이를테면 해와 달의 움직임에서 관찰한 규칙성은 하루를 스물네 시간으로, 일 년을 열두 달로 나누는 달력을 탄생시켰다. 일 년 열두 달은 기후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개 계절로 다시 나누었고 이렇게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무질서한 자연은 이제 얼마간 예측 가능한 것이 되었다.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던 자연은 이제 곡물이 잘 자라도록 돕는 토대이자 영양분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분류를 따질 만큼 거창하게 접근하지 않더라도 분류는 우리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분류는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 뿐 아니라 어느 경우에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가 되기도 한다. 가령 마트에서 판매하는 수많은 일상용품이 ‘식품,’ ‘주방용품,’ ‘욕실용품,’ ‘침구’ 따위의 코너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면, 딸기잼 하나 찾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릴지 알 길이 없다. 대형서점 역시 분류의 원칙과 체계가 선명한 곳이다. 수십 만권의 책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 정리하는 일은 고객이 필요한 책을 찾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서점의 판매 수익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빨강과 주황 사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풀이하거니와, 분류에는 틈이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분류란 인간적인 것이다. 분류란 어떠한 질서와 체계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 자체로 하나인 자연을 인위적으로 나눈 것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판단에는 반드시 분류 주체의 욕망이 앞선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다수의 욕망에서 비켜선 소수의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무지개를 보라. 빨강과 주황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는 호명되지 못하기에 볼 수 없다. 도레미파솔라시도는 어떤가? 헤아리기 어려운 수많은 음들이 도와 레 사이를 미끄러져 나간다. 한 달에 네다섯 번,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편두통을 앓고 사는 나는 장애인인가, 비장애인인가? 콧잔등에 거무스름하게 자라난 솜털 같은 수염 때문에 ‘옥수수박수염차’ ‘박수여미~’ 라는 별명을 한동안 달고 산 나는 여자인가, 남자인가?
미끄러지는 욕망
서점에 가서 ‘음악’ 책을 사려고 ‘경제’ 구역을 뒤지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음악으로 돈 벌기’가 궁금할 경우 상황은 복잡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편리하고 쾌적한 대형서점 대신 골목길 비좁은 독립서점을 찾는 현상은 분류에 관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거기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효율적인 분류 대신 서점 주인의 창의적인 시선을 통과한 세계와 만난다. 대형서점에서는 결코 찾기 어려운 책을 발견하거나 서점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비밀스럽게 헤아려보기도 한다. 거기서는 효율성의 세계에서 미끄러진 욕망이 분류들 사이 깊게 패인 틈을 타고 흐른다.
드물지만, 분류체계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은 채 그 틈에서 꼿꼿한 존재감이 자라나는 경우도 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에서 내려올 줄 모르던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하 『물고기』)가 그렇다. 밀러의 『물고기』는 과학, 철학, 역사, 전기, 소설, 수필 따위의 어느 장르로도 명료하게 포획되지 않는다. 『물고기』가 놀라운 것은 그 내용이 담고 있는 혼돈, 자연, 질서, 분류에 관한 복잡한 문제들을 스스로 껴안아 마침내 도서 분류체계의 어디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틈’을 베스트셀러라는 중심지로 전복시켰다는 데 있다.
분류는 사회를 존속시키는 약속이다. 분류는 불특정 다수가 오해 없이 소통하는 것을 지향한다. 분류는 그러므로 객관성을 추구한다. 대형 마트에 가서 딸기잼을 사려면 ‘식품’ 코너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마트 주인과 나 사이 분류라는 약속이 있어서다. 분류체계가 없으면 문명은 불가능하다.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로 잠식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의 실험이 밝혔듯 무엇인가를 분류하는 것에는 그 자체로 사회적으로 학습된 인식적 틀이 내재한다. 그 인식의 틀은 인류 최초의 분류가 그랬듯 무엇무엇을 향한 욕망으로 짜여진다. 긴 시간 켜켜이 쌓인 욕망은 단단하게 굳어지다가 마침내 스스로 자연이 된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객관적이고 마땅해 보이는 우리 주변의 수많은 분류를 다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