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찬란한 청춘은 무엇으로 차 있나요? 청춘이란 어설픈 실패에 휘청거릴지라도 꿈, 미래, 즐거움, 욕망이 생동하는 푸르른 시절이겠지요. 하지만 누군가의 가장 찬란해야 할 시절은 전쟁이라는 지옥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손꼽힐만큼 참혹했던 두 차례 전쟁을 치르며 모든 것이 말살된 20세기, 독일 문단에서는 어떤 작품들이 반향을 일으켰을까요? 비인간적인 시대에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신념을 담아 저마다 다른 소재, 문체, 주제로 탄생해 당대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독일 작가들의 대표작들을 소개합니다.
『이별 없는 세대』
『이별 없는 세대』는 보르헤르트가 폭력의 시대 한복판에서 빚어낸 작품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마치 그림을 보는 듯 잔인하고 생생한 글로 그려내고 있어, 책을 읽고 나면 책에 얻어맞은 듯 온몸에 알싸한 통증이 일어납니다. 천재라 촉망받으며 이제 꿈을 펼치려던 스무 살, 보르헤르트는 히틀러의 악령이 깃든 전쟁터로 징집됩니다. 그는 정치적 견해 문제, 자해 행위, 포로 생활 등의 여러 이유로 수용소와 병원을 오가는 20대를 보냈습니다. 20세기 초 전쟁 시절은 모두에게 악몽 같았지만, 특히나 보르헤르트는 태풍의 눈,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갖은 고초를 치르며 청춘을 보낸 것이죠. 삶보다는 죽음에 더 익숙해져 버린 절망적인 나날 중에도 그는 주옥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파멸, 죽음, 분노, 좌절, 고통이라는 감정들을 형상화한 그의 기록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일생을 보내야 했던 한 젊은이의 절망과 체념을 한 치의 왜곡 없이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에게 깊이는 끝 모를 나락이다. 우리는 행복도 없고 고향도 없고 이별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젊음은 젊지 않다. … 우리는 신이 없는 세대다. 우리는 만남도 없고 과거도 없고 인정받지도 못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_ 볼프강 보르헤르트, 『이별 없는 세대』
모든 것을 하얗게 덮은 눈 내린 폐허처럼 그의 작품은 고요한 적막으로 꽉 차 있어 묵직합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홀짝이며 읽기보다는 경건히 책상 앞에 앉아 한 장 한 장을 온 정성을 다해 소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 날 것 그대로의 참상을 전하고 있어 몇 줄만 읽더라도 괴로워지지만, 책을 덮은 후에도 그의 글이 반짝이는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그가 ‘만남도 깊이도 행복도 고향도 없는 세대’라며 시대 앞에 좌절하면서도, 단아한 문장에 한 줌의 유머와 사랑, 용기를 기어이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이 그리는 폐허의 풍경, 그 안에 여리게 피어나는 우정은 그 어느 글보다 더 처연하고, 더 강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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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전쟁과 탄압의 잔인함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사랑만 한 소재가 있을까요. 개선문은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한 시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합니다. 유럽 대륙 전체가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회색빛 세상인 시대, 내일 없이 살아가는 비참한 나날이 일상인 시대에 파리는 유럽 각국 피난민들에게 일종의 피난처였습니다.
주인공 라비크는 독일 수용소에서 탈출해 파리로 망명한 의사입니다. 신분을 감추고 불법 대리 수술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죠. 언제 어디서 신분이 들킬지, 게슈타포가 쫓아와 체포할지 두려워해야 하는 삶입니다. 커다란 희망도 원대한 꿈도 없이,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지내는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개선문에서 가까운 센 강에서 한 여자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삶의 모든 것이 사랑으로 가득한 삼류 배우, 조앙 마두입니다. 자유롭고 파괴적으로 사랑하는 조앙 마두에게 친숙함과 매력을 느끼는 라비크. 피난민으로서 늘 불안에 차 있는 파리 생활에 햇살 같은 사랑이 비춥니다.
“당신은 나를 살아 있게 해 주었어. 나는 그냥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해 주었어.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충분치 않아. 강물 속 아주 작은 부분, 물 한 방울, 나뭇잎 하나밖에 되지 않아. 사랑은 훨씬 더 큰거야.”
_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하지만 이 이야기는 비단 남녀의 사랑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라비크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전체 스토리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어쩌면 격정적인 사랑의 두 주인공 이야기보다도 끈기 있고 무던하게 생활을 꾸려가는 소시민들과의 이야기가 작품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죠. 시대가 만든 애처로운 그들의 사연에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눈물겹도록 다정한 심성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다보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그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주인공 라비크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난세에서 묵묵히 자기 생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지닌 힘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선문을 지나기에 마땅한 용사들은 좌절의 시대를 무사히 지낸 격의 없고 소박한 소시민들이지 않을까요? 이토록 인간적인 일상과 잔혹한 수용소의 심문, 지옥 같은 피난민의 삶이 동시에 묘사되고 있어 전쟁의 참상이 더 격렬하고 잔인하게 와닿는 작품입니다.
『삶의 한가운데』
손꼽히는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작가가 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작가, 괴테입니다. 유명한 사람이나 자신이 선망하던 인물이 자살했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동조해 모방 자살이 잇달아 일어나는 효과를 일컬어 ‘베르테르 효과’라고 빗대곤 하죠. 전후 독일에도 비슷한 유행이 있었으니, 바로 ‘니나 신드롬’입니다. 니나는 침체한 전후 독일 사회에 굴하지 않고 생기 있는 자유를 추구하며 ‘진정한 자기 삶’을 산 루이제 린저의 소설 속 인물입니다.
1950년에 출간된 소설 『삶의 한가운데』는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독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가 전쟁터를,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파리를 배경으로 했다면 『삶의 한가운데』는 대공황 이후 나치가 득세하던 살벌한 독일 사회의 중심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니나라는 여성입니다. 니나의 생애는 그녀의 언니 마르그레트, 그리고 평생 니나를 사랑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던 스무 살 연상의 의사 슈타인이 바라본 이인칭 시점에서 그려집니다.
“생과 사를 결정하는 재판관은 누가 됩니까?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살인이라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당신같은 양심없는 사람들이 재판관이 되겠죠. 그리고 그들은 법이라는 미명하에 한번 죽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옳든 그르든 상관 않고 계속 죽이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살인자들만 남겠지요. 나는 이에 반대히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_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탄압과 통제의 시대에 굴복하는 것은 치욕스럽지만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정석 같은 삶을 살아온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 의사인 슈타인에게 니나는 새장에서 탈출해 자유로이 비행하는 새 같습니다. 말, 행동, 생각까지도 통제되는 살벌한 시대에 굴하지 않는 니나는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즉흥적인, 생기와 격정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색채 없이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전쟁 소모품 같은 생을 사는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 생을 꽉 껴안고 질주하는 독창적 인물이죠. 니나의 자유로움과 정의감을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의과대학에 진학해 벌이는 투쟁 장면입니다. 당시 나치는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인간을 과학과 의학으로 분류해내 안락사할 것을 지시합니다. 인간 존재 이유까지도 철저히 국가에 종속시키는 이념에 무기력하게 굴종하는 분위기에 맞서, 니나는 두려움 없이 외칩니다.
관찰자이자 화자인 슈타인은 이렇게 자유롭고 당당한 어린 소녀가 성숙한 여인이 되고 국가와 맞서 도망하며 파란만장한 일생을 지내는 모습을 일평생 지켜봅니다. 슈타인은 니나를 흠모하며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회한에 잠겨 자괴하죠. 작가는 시대에 굴하지 않는 히어로만 앞세우지 않고, 어쩌면 평범하게 시대 속에 묻혀 살았던 사람의 뼈아픈 후회와 실존 의식까지 다뤄내 독자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자기 메시지를 전합니다. 어떤 삶이 더 참된 자기 주체적인 삶인지 생각해보라고요.
『삶의 한가운데』 상세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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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극단적인 결말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현상인 전쟁으로 맺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만행이죠.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절망의 시대에서도 기어코 남겨진 투명하고 불꽃 같은 기록을 읽고 나면 우리의 청춘은 어쩐지 과분한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당대의 비참함과 우리의 안락함을 비교하며 자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당대 작품들이 고통과 절망을 희망으로 극복하자는 진부한 메시지만을 담고 있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 작품이 다루는 장소와 인물은 모두 다르지만, 전쟁과 죽음의 폐허에서도 또 다른 삶과 사랑, 역사는 반드시 살아남아 새로운 시대를 생동시킵니다. 이처럼 당대 독일 문단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삶의 이유는 반드시 시대의 조건에 종속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본질이 어렴풋하게 깨달아집니다. 최악의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이 저마다 어떻게 살았을까, 잠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막막하고 뿌연 미래를 앞둔 우리들의 생이 위로받는 듯합니다. 암흑의 역사에서 탄생한 위로와 치유의 문학으로, 권태로운 새해의 출발선에 서 있는 여러분의 기운이 북돋아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