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대체로) 점점 민주화되고 있다. 적어도 패션에서는 그렇다. VIP 고객 몇 명만 볼 수 있었던 패션쇼를 모두가 볼 수 있고, 매거진 에디터나 바이어가 아니어도 새로운 컬렉션이 발표되는 즉시 알 수 있다. 그 배경엔 ‘디지털’이 있다. 디지털 기술은 순식간에 다수에게 닿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하지만 인류가 달성한 민주화가 자본주의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패션도 분명 민주화되었지만 계급의 구분을 없애지 못했다. 디지털 기술 역시 그 한계를 끌어안고 있다. 아니, 그 한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원인일지도 모른다.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는 누굴 위한 것일까?
패션의 민주화
현대 패션사를 살펴보면, 패션은 두 번의 민주화(democratization)를 거쳤다. 첫 번째는 기성복이 확산되면서 누구나 트렌드를 즐길 수 있게 된 것. 그 전까지 럭셔리 하우스에서 주도하는 패션은 오뜨 꾸뛰르라(haute couture)는 고급 맞춤옷을 감당할 수 있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고 기성복이 확산되고 나서야 대중도 트렌드를 직접 즐길 수 있었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는 오뜨 꾸뛰르가 아닌 레디 투 웨어(ready-to-wear)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점차 화장품과 향수 산업까지 진출하면서 상류층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 타겟을 확대했다. 이처럼 첫 번째 민주화는 계급 중심의 구조를 벗어나면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민주화는 온라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본래 패션쇼는 셀러브리티나 패션 유통 기업의 바이어, 매거진 에디터 등 선택 받은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고, 대중은 새로운 컬렉션이 매거진에 소개되거나 매장에 유통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즉 대중은 패션쇼 이후 6개월이 지나서야 트렌드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패션쇼가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중계되며 전 세계의 소비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새로운 컬렉션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은 누구나 실시간으로 패션을 목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두 번째 민주화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만 선택되는, 엘리트 중심의 구조를 벗어나면서 이루어졌다.
이제 패션도, 패션쇼도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패션이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과정은 민주적인 사회에 걸맞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란 무엇인가?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democratize’의 뜻을 ‘make something accessible to everyone(모두가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패션의 민주화는 정말로 달성된 것인가?
닿을 수 있다는 환상
럭셔리 패션 브랜드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건, 소수의 소비자로는 확실한 매출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중화는 더 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여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다. 동시에 럭셔리 패션 브랜드는 ‘럭셔리’의 지위를 유지해야 했다. 고객층을 넓히면 지위를 잃고, 지위를 고집하면 고객층이 좁아진다. 그래서 럭셔리 패션 브랜드는 닿을 수 있다는 환상을 제공할 뿐, 닿지 못하는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 애썼다. 엘리트와 대중 사이를 팽팽하게 오가는 줄다리기를 통해 자본과 계급 모두를 쟁취했다. 그렇게 다수가 쉽게 다가갈 수 있되 동시에 우러러보는 구조를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위계질서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특권을 가진 자는 여전히 특권을 누린다. 이것이 럭셔리가 기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구분되고자 하는 욕망은 럭셔리의 본질이다. 럭셔리는 대중화될수록 대중과의 차이를 지속적으로 벌리고, 럭셔리 중의 럭셔리가 끝없이 생산되며, 빈부의 양극단은 점점 멀어진다. 럭셔리의 구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 극화된 럭셔리가 생산되는 현실이 민주화, 대중화라는 환상으로 가려질 뿐이다. 구분과 배제가 더 미묘하게 이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대중화는 환상이다.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패션쇼가 모두에게 개방되었지만, 누군가는 현장에 직접 앉아있는 반면, 누군가는 화면 너머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스크린 너머로 패션쇼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현장에 있는 선택된 사람과의 괴리를 느낀다. 닿을 수 있다고 느낄 뿐, 패션쇼는 여전히 먼 곳에 있다. 패션 산업의 위계질서는 견고하고, ‘맨 앞줄(front row)’의 권력은 범접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 선택 받지 못한 다수는 무엇을 얻지 못했는가? 무엇이 제한되는가? 이 구분과 배제의 메커니즘은 단순히 패션쇼를 관람하지 못한 것에서 끝날까?
자본화되는 물리적 접촉
디지털은 럭셔리 브랜드가 환상을 만드는 데 효과적인 도구다. 디지털은 접촉하고 경험하고 있다는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에, ‘닿을 수 있다는 환상’만 전달하고자 하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입장에서 탁월한 선택지다. 하지만 디지털의 한계는 분명하다. 디지털을 통한 접촉과 경험은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다. 스크린으로 쇼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고, 보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을 카메라가 통제한다. 현장에 흐르는 분위기, 공기의 온도나 습도, 여러 소리를 경험할 수 없다. 참여도와 자발성, 감각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자본과 계급이 미디어를 통해 경험을 통제하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과 계급은 실제의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자와 누리지 못한 자를 나누는 기준이다. 현장감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며, 디지털은 다수를 간접 체험에 만족하게 한다. 즉, 물리적 경험은 자본화/계급화되었다. 물리적 경험이 자본화되었다는 것은 현장을 겪는 일, 사람을 대면하는 일에 자본과 계급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식당을 떠올려보자. 패스트 푸드 점포에는 키오스크가 많아지지만, 고급 레스토랑에도 키오스크가 확산될까? 다수에게 동일한 서비스를 단숨에 제공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이 이용되지만, 다수가 아닌 소수에게는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사람의 직접적인 응대, 물리적 접촉은 자본화되었다.
키오스크가 확산된다는 것으로 사람을 만나는 데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나타난다는 우려는 다소 과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자본은 사람의 경험, 참여, 접촉 또는 고립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거노인 중 우울감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은데, 특히 자본이 부족할수록 그 경향이 심해진다고 한다(Green et al, 2021). 상술했듯, 럭셔리의 범주는 점점 협소해질 것이다. 대중과 VIP를 넘나드는 줄다리기는 그 구분을 점점 양극단으로 밀어낼 것이다. 극화되는 자본과 계급의 구분, 그리고 그 구분이 빚어내는 경험과 접촉의 차이. 물리적 경험과 접촉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까?
디지털 기술이 가져오는 연결은 분명하다. 패션쇼의 라이브 스트리밍은 수많은 사람들의 대화를 촉발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디지털 미디어는 그만큼 민주적인 논의를 활성화시킨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회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관성적인 힘은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뿌리 깊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평행선을 하나 그려보자. 복잡다단한 계급의 구분을 임의로 직선 하나에 반영해볼 것이다. 왼쪽에는 계급이 낮은 집단, 오른쪽에는 계급이 높은 집단이 있다. 왼쪽 끝단에 위치한 집단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접근조차 어려운 집단이다. 세상에는 디지털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노인, 빈곤한 자, 도서산간 지역의 사람들… 가장 오른쪽 끝단에 위치한 집단은 패션쇼의 초대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디지털 기술 바깥에 위치함으로써 지위와 권력이 유지되는 집단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배제되지만, 누군가는 벗어난다. 이 직선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질문은 선명히 떠오른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디지털은 경험을 확장하는 기술인가, 배제하는 기술인가? 디지털은 연결하는 기술인가, 단절하는 기술인가?
- Halliday, R. (2017). The live fashion show in mediatized consumer culture [Unpublished doctoral dissertation]. York University.
- Green, M. J., Whitley, E., Niedzwiedz, C. L., Shaw, R. J., & Katikireddi, S. V. (2021). Social contact and inequalities in depressive symptoms and loneliness among older adults: A mediation analysis of the English longitudinal study of ageing. SSM – Population Health,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