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주제의식으로 엿본
역대 노벨문학상

한강 작가와 공통된 주제의식으로
문학의 힘을 보여온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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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혔습니다.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며, 작품마다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고 말이죠.

이번 아티클에서는 한강 작가 주요 작품이 지닌 세 가지 특징을 토대로 그와 유사한 주제 의식이나 배경을 지닌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3명과 그들의 대표작을 되짚어봅니다. 보이지 않는 권위에 맞서고, 상처받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면의 고독과 연약함을 도리어 강인함으로 바꾸어 증언하는 작품들이죠. 그들의 작품은 어떤 방식과 내용으로 주목을 받았을까요? 시대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우리가 어떤 삶을 꾸려야 할지 숙고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놀라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모두와 고립된 내면 세계를
독창적으로 주목하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
작가 사무엘 베케트, 이미지 출처: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한강 작가를 전 세계에 알린 대표작으로 『채식주의자』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겠다 선언한 주인공은 스스로를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 고기를 먹이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넣기도 하지만 주인공은 폭력적인 방법을 거부하며 고립되기를 택하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주인공은 세상과 단절됩니다. 심지어 독자들까지도 원인 모를 행동을 계속 하는 주인공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이후 일어나는 사건들을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죠. 분절된 방식으로 간신히 엿볼 수 있는 주인공의 감정을 더듬어가다보면 이는 비단 그의 일만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옵니다. 『채식주의자』는 인간이라면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고독과 외로움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죠. 세상 모든 존재에게서 고립된 우리들의 내면 세계,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부조리를 독창적으로 그려내어 당대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작가가 떠오릅니다. 부조리극의 대가라 불리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사무엘 베케트입니다.

사무엘 베케트, 『몰로이』와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는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에 실험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작가입니다. 1969년 노벨상 위원회는 베케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다음과 같이 선정 취지를 밝혔습니다. “소설과 연극에 있어서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그의 글 속에서 현대인의 궁핍함이 고양감을 획득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소설과 희곡은 꼭 필요한 요소를 갖춰야 했습니다. 화자, 플롯, 서사, 언어 등이 명료해야 했죠. 그런데 베케트는 이 모든 것을 지키지 않았을뿐더러 전부 분절시키거나 난해하게 처리해 혼란스러운 작품을 내놓습니다.

작가의 대표작인 『몰로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노인 몰로이가 어머니의 집을 향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합니다. 1부 내레이터인 몰로이는 어머니 방에 머무르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있었던’ 어머니 집으로 여정을 떠나는데요.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기에게 아들이 있는지, 글을 쓴다면서도 이 철자법이 맞는지 등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잊어버렸죠. 그렇지만 ‘자기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주장합니다. 여정 중 그의 지각 능력과 운동 능력이 점점 퇴화하면서 작품의 서사까지 불분명해지지만, 몰로이는 ‘어머니의 집으로 간다’는 여행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걷는 것이 힘들어 기어가던 중 도랑에 빠져 죽으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죠. 2부는 이런 몰로이를 추적하라는 명령을 모호하게 전달받은 탐정 모랑의 여정을 주목하는데요. 모랑 역시 추적 중 불구가 되어가고 정신력도 약해집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적하다가 복귀하게 되지만, 아들에게도 버림받고 온전치 못한 몸으로 힘겹게 귀가해 작성한 보고서 내용이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을 보며 우리는 몰랑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Anthony Rathbun

또 다른 대표작이자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도 함께 살펴볼까요? 늙은 방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시골길 나무 곁에서 고도를 기다립니다. 고도가 누구인지, 언제 오는지, 이 장소가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은 지루함을 달래며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죠. 기다리는 대상은 번번이 오지 않아 서사는 전혀 진전이 없고,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의 인지 기능은 점점 떨어집니다. 언어는 파편화되어 전달과 소통의 기능을 상실하고요.

이렇게 육체와 정신이 온전치 않은 내레이터들 때문에 베케트의 작품에서는 여정이나 기다림의 의미, 그리고 그 과정 전부가 불분명합니다. 언어는 분절되고 세계는 비논리적이며 소통을 위한 발화에는 모순이 가득합니다. 그래도 확실한 단 하나가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그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의 한 장면.
얼마 전 막을 내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파크컴퍼니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는 인간의 삶과 자아 탐구를 이들의 여정에 빗대어 보여줍니다.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고 말했던 데카르트의 말을 전제로 바라본다면 베케트 작품 속 인물들은 생각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다다릅니다. 정신과 육체는 마치 소통이 불가능한 고목처럼 부서지고 소멸됩니다. 그에 따라 작품의 서사와 플롯, 목적의식도 흐릿해지는 듯하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는,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의미 없는 생각과 행동을 지속하는 인물들에게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무의미해 보이는 여정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려 애쓰는 인물들의 의지는 극이 마치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타오릅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어머니 집으로 가야 한다’는 목적의식,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인물들의 기묘한 열정이 독자와 관객에게 파동을 일으키지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삶, 타인은 물론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로부터도 단절된 소외가 베케트가 고백하는 ‘인생의 모양’입니다. 이해 불가하고 부조리한 삶에서 자신이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 과제를 묵묵히 수행하고 저항하는 것이 베케트가 포착한 ‘존재의 의미’고요. 그의 작품 속 외로운 이방인들은 끈덕지게 자기 존재를 버텨냈고 작가는 그들의 여정을 뜨겁게 증언했죠. 노벨상 위원회가 밝힌 선정 이유를 재차 인용하자면 현대인의 삶은 부조리하고 분절되었기에 외롭고 궁핍하나, 존재를 용감히 지속해 내는 것으로 ‘고양감’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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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당한 목소리들을 모아
역사를 재구성하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미지 출처: 문학동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 『흰』 등의 작품들은 외면하지 말아야할 우리 역사를 마주합니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권위가 불태워 없앤 진실을 고백하는 목소리들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지요.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는’ 주제 의식이 가장 돋보였던 작품들입니다. 눈송이처럼 여리고 연약한 목소리들을 기록으로 담아내던 한강 작가는 집필 중 참 많이 울었다고도 하죠. 국가가 일으킨 잔인한 현장에서 돌아온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참된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가 정신을 보여줬던 또 다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있습니다.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입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체르노빌의 목소리』

2015년 노벨문학상은 ‘목소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소비에트와 포스트 소비에트 시기의 비극적 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서술한다는 평가를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돌아갔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속하는 구 소련 소도시 스타니슬라프에서 태어난 그녀는 당시 대부분의 소련 사람처럼 소련이 유토피아라고 믿으며 국가와 이념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1945년 5월9일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에 항복을 선언했다. 사진은 지난 5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치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승리의 날을 기념해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1945년 5월9일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에 항복을 선언했다. 사진은 지난 5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치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승리의 날을 기념해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로이터

작가는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기자로 활동하던 중 아프가니스탄 전쟁, 체르노빌 원전 참사, 소련의 붕괴와 각종 테러 등 20세기 소련이 벌인 비극의 중심을 경험합니다. 그녀가 주목한 것은 국가와 권력이 기록한 역사가 아닙니다. 자신이 그렇게 교육받았듯 조국과 이념을 위해 희생하기를 강요받으며 평생 믿은 세상으로부터 배신 당한 ‘작은 사람들’, ‘무시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주목했죠. 그렇게 전쟁에서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 아이들의 경험에 주목하며 그들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기록으로 모아 발표합니다.

작가는 이들이 겪은 비극의 순간을 온전히 전달하기에는 기존 문학 장르도, 신문 기사와 같은 기록 장르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의 분담과 공감에 대한 절실함을 호소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더 온전히 전달될 수 있도록 기록의 방식을 치열하게 고민했죠. 마침내 ‘목소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찾아낸 그녀는 다큐멘터리와 문학이라는 방법을 넘나들며 오직 피해자와 패자만 존재하는 잔혹한 현실을 증언합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작품이 문학인지 논픽션인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합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 이미지 출처: 뉴욕타임스

장르 정의는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작가가 재구성한 ‘진짜 역사’에 집중해 보죠.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여성들의 인터뷰를 모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의 회고를 모은 『아연 소년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담은 『체르노빌의 목소리』 등의 작품을 통해 국가의 파괴가 어떻게 개인의 파괴로 연속되었는지 보여줍니다. 이 인터뷰이들은 국가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공식 기록이 주목하지 못하는 개개인 내면세계의 처참한 분열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면서 전쟁만큼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체르노빌 원전 사고 생존자 고백을 모은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지요. 이 사고가 비극이었던 것은 ‘미지의 사고’인 까닭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인간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유형의 비극이라면 원전 폭발은 인류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재앙의 모양이었죠. 희생자들은 국가가 방사선 피폭의 위험을 알리지 않고 자신들을 현장으로 내몰았던 배신의 아픔부터, 죽어가는 연인을 방사성 물질로 바라봐야 했던 고통, 뼈가 부스러져 피부 조직과 내장 조각을 직접 훑어내야 했던 날들, 출산한 아기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죽었는데도 시신을 볼 수도 없었던 날의 비참한 순간을 고백합니다. 이런 개별적인 체험은 공식적으로는 ‘숫자’의 형태로만 간신히 기록됩니다. 그마저도 집계되지 않는 경우는 태반이고요. 작가는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며, 상처 입은 영혼을 공식적인 역사 기록의 반열로 끌어올립니다. 미화되고 정제된 국가적 기억이 아니라, 현장 한 가운데서 처참한 사건을 온몸으로 겪은 개별 체험의 집합체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포옹하는 루카셴코 대통령(왼쪽)과 푸틴 대통령.
포옹하는 루카셴코 대통령(왼쪽)과 푸틴 대통령. 이미지 출처: 타스연합뉴스

이렇게 진실의 조각을 모아 역사를 고발하니 전쟁 승리를 아름다운 역사로 드높이거나 국가 비극을 극도로 정제하려는 목소리와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자의 기록이 아닌 ‘작은 인간’에 주목한 까닭에, 그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음에도 러시아와 조국 벨라루스 권력층의 서슬 퍼런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선정적이고, 친서구적이며, 조국의 아픈 역사를 이용하는 작품일 뿐 아니라 ‘목소리 소설’이라는 장르 또한 인터뷰를 짜깁기한 것으로 작품성이 없다는 식으로 매도되었고요. ‘유럽 최후의 독재자’로 불리는 벨라루스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에게 “벨라루스의 일부 예술가와 작가들,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까지도 해외에 나가서 조국에 먼지를 뿌려 더럽히고 있습니다.”라고 비난합니다.

강연 중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강연 중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미지 출처: EBS

하지만 스베틀라나는 꿋꿋하게 작가의 역할을 믿고 나아갑니다. 사람들의 상처 입은 영혼을 기록해 진실한 역사를 통한 위로와 공감을 도모하는 연대기 작가 역할을 말이죠. 그녀가 옮기는 것은 단순히 사건의 역사가 아니라 ‘영혼의 역사’입니다. 무엇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는 시간이 판단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그녀는 망명 생활 중에도 꿋꿋하게 소신 발언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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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서정시로 상처 입은 세상에
공감의 씨를 심다

작가 루이즈 글릭
작가 루이즈 글릭. 이미지 출처: 아주경제

한강 작가는 시적 산문이라는 방식으로 작품에 담긴 슬픔과 잔인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소설 뿐 아니라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를 사용해 상처 입은 영혼에 공감과 위로를 선사하는 작품들이지요.

아픔을 마주하고 삶을 견디어내는 단단한 태도가 돋보이는 한강의 시선집은, 이 생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하는 힘을 지녔습니다. 부드러움 속에 깃든 강인함이라는 수식어가 절로 떠오르죠.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루이자 글릭도 시적 언어의 힘을 활용해 부드럽고도 강인한 위로를 전달하는 작가입니다.

루이즈 글릭, 『야생 붓꽃』

2020년 노벨문학상은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에게 돌아갔습니다. 당시 117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시 분야에서는 미국 시인으로 1948년 T.S.엘리엇 이후 처음이었고, 여성 시인으로는 1996년 비스와봐 쉼보르스카 이후 24년 만의 수상이었습니다. 시인들에게도, 여성 작가들에게도 구원과 위안이 되는 수상이었죠.

루이즈 글릭이 2016년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휴머니티 메달을 받는 장면
루이즈 글릭이 2016년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휴머니티 메달을 받는 장면. 이미지 출처: AP 뉴시스

루이즈 글릭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입니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작가는 아니었기에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유명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노벨상 위원회가 밝힌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확고한 시적 목소리로 개인의 실존을 보편적으로 나타냈다”라는 선정 이유처럼, 문학은 물론 시는 더더욱 홀대받는 시대에서 글릭은 시라는 언어의 힘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시라는 말을 들으면 현학적이고 치렁치렁한 은유가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글릭은 현란한 기교는 물론, 어려운 단어를 동원하지 않습니다. 수수한 단어를 단정하게 배열하면서 꽃과 나무, 풀과 황혼 등의 소박한 자연을 세세하게 바라봅니다. 그렇다고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작품에는 부드럽고 강인한 시선과 동시에 작가 본인을 비롯 불특정 개인, 시대의 고통과 울음이 담겨있죠. 이런 작품세계가 탄생한 데는 그녀의 성장 배경이 녹아있습니다.

그녀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미국에서 비주류로 여겨졌던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섭식 장애를 겪어 치료에 집중하느라 고달픈 청소년기를 겪었고, 자신이 태어나기 전 있었던 언니의 죽음에 대한 부채감 등으로 죽음과 상실 문제에 깊이 천착해 지냅니다. 대량 학살의 경험을 간직한 민족성과 소수자 집단이라는 위치, 개별적인 상실로 인한 내적 고통을 겪은 것인데요. 일련의 시간을 통해 글릭은 고통을 깊이 들여다보며 버티는 힘과 이를 기록으로 옮기는 힘을 배우죠.

보통 풍경을 그려낸 서정시에서는 정원사, 나그네 등 인간의 시선으로 꽃들을 바라보지만 글릭은 반대로 꽃에게 목소리를 입혀줍니다. 대표작 『야생 붓꽃』에서 꽃은 인간과 같은 층위를 지니고 인간들에게 말을 겁니다. 꽃양귀비, 눈풀꽃(설강화), 개기장풀(마녀의 풀)은 각자 대지에서 짓눌린 기억과 차가운 빛에 대한 감각, 산산이 부서진 경험을 고백합니다. 잡초이면서 풀인 존재들이 ‘살아남기 위해 당신 찬사는 필요 없다, 당신이 있기도 전에 내가 먼저 여기 있었으니, 나는 여기 있을 것이다, 내가 들판을 만들 것’이라고 선언하지요. 그들의 외침에 몰입하면서 독자는 그 꽃이 되고, 꽃들은 인간으로 확대됩니다. 식물이 지닌 상처와 인내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인간의 삶으로 치환되면서, 우리는 시를 통해 내면에 묻어둔 상처와 우리가 놓친 타인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나의 고통을 낱낱이 알리는 토로의 방식이나 자연물을 바라보며 달관하며 치유하는 방법이 있겠지요. 글릭은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주체가 되는 목소리에 능숙하게 변주를 주면서 독자 개개인이 지닌 소외의 체험과 시대 문제를 고백합니다. 슬픔과 고통을 후벼파는 절규의 목소리보다는 차분한 목소리로요. 각고의 시간을 견뎌낸 인내의 주체가 식물의 세계에 기대어 전해주는 공감은 저항 없이 독자 내면에 스며들지요. 감정과 표현이 과한 서정시의 시대에서, 글릭은 그렇게 ‘절제된 서정시’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희망조차도 섣부르게 제시하지 않는 현실적이고도 정돈된 목소리로부터 우리는 오히려 순순히 자기 성찰의 단계로 넘어가 개인과 시대가 나아갈 길을 주체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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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수상을 계기로 그동안 세상을 바꾸는 문학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온 다른 작품의 가치 또한 돌아보았습니다. 그 시대에 처한 문제와 인간의 고민을 첨예하게 다뤄 주목받은 작품들이었죠. 더욱 신기한 점은, 서로 다른 어조와 방식을 택하고 있지만 소개한 작품들 모두 위로와 치유의 능력도 지닌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외로운 우리 존재에 위로를 건네고 그 치열한 생을 증언하는 것이 문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그저 기쁜 소식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문학이 지닌 힘이 우리 삶과 세상을 바꾸는 모습을 경험하고, 그렇게 더 많은 사람들이 문학의 힘을 믿을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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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빈

고전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방황하고 반항하며 만드는 담론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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