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영화감독 박찬욱은 사실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부터 다수의 영화 평론을 쓰기도,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훗날 이를 묶어 책으로 출판한 이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박찬욱에게 영화만큼이나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는 바로 사진인데요. 학창 시절 아버지의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 그는 대학 사진반에 들어가 활동하는 등 영화보다 일찍이 사진을 접했습니다. 이후 자신의 영화 <아가씨>의 이미지를 기록한 사진집을 내고, 사진작가로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합니다.
최근 박찬욱은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영화 <헤어질 결심>의 포토 에세이 『어떻게 헤어질 결심을』을 써내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연출한 그는 사진작가로서 영화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사진과 코멘터리를 남기며 작품 세계를 확장시켰죠. 특히 박찬욱은 날 선 감각으로 철두철미하게 영화를 만드는 대신, 사진만큼은 우연에 기대어 익숙한 풍경 속 낯선 장면을 포착합니다.
박찬욱이 발견한 우연한 순간들
“여기 스토리텔링의 구속에서 풀려난 이야기꾼이 있다.”
_씨네21 편집위원 김혜리
한 편의 영화가 스크린에 옮겨지기까지 감독과 배우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뒤따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개 철저히 계획적이기 마련이죠.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의상과 미술, 조명과 대사 등 여러 요소가 맞물려 의도했던 장면이 연출됩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감독은 거듭 의사 결정을 요구받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박찬욱은 묵직한 책임감이 뒤따르는 영화의 공동 작업 환경에서 벗어나는 순간, 디지털카메라를 쥐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복합한 레이어를 켜켜이 쌓아가는 영화가 의도된 필연이라면, 사진작가 박찬욱의 렌즈는 우연을 담아냅니다.
박찬욱의 사진은 전문 스튜디오에서 조명을 갖추고 촬영한 이미지가 아닙니다. 보통 길에서 마주한 것들을 담아내죠. 그만큼 우연이 필요합니다. 그는 우연한 순간을 위해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어디를 가나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살피며 자신을 놀라게 하는 무언가를 찾습니다. 동일한 장소도 시시각각 다른 햇빛을 머금으며 변화하듯이, 익숙한 풍경에서도 낯선 분위기를 감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죠. 우연을 완벽히 의도할 수는 없어도, 우연을 발견하기 위해 그의 시선과 렌즈는 언제나 분주합니다.
2021년, 사진작가로서의 첫 개인전 ≪너의 표정(Your Faces)≫에서 박찬욱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30여 점의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와 달리, 그의 사진에는 인물이 배제되고 사물이 자리를 대신하는데요. 대부분 행인은 그냥 지나쳤을 만한 사물들이 온전히 주인공이 되어 고유한 표정을 짓습니다. 우연한 순간에 포착된 이미지임에도 각각 서사를 품은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호수를 부유하는 청둥오리와 물고기들, 아래로 늘어진 나뭇가지들, 그리고 박찬욱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맞닥뜨린 용설란 줄기와 붉은 자동차의 색감 대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은밀히 숨어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우연한 표정들
본래 사물에는 표정이 없습니다. 다만 박찬욱의 사진 속 사물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상상해 보기 좋은 낯선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습니다. 사진집 『너의 표정』에 기록된 ‘Face’라는 작품명을 보면서 ‘표정’을 찾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일 테고요. 그중 유령처럼 보이는 파라솔 사진은 모로코의 한 호텔 수영장에 있던 접힌 파라솔입니다. 박찬욱은 셔터를 누를 결심을 하기 직전, 밤마다 모여 떠드는 유령을 떠올렸지만, 누군가는 이 파라솔의 표정을 보고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겠죠. 그의 사진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이따금 영화를 보다가 익숙한 동네에서 촬영한 장면과 우연히 마주한다면, 그 순간만큼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작품 속 인물이 달리고 있는 거리를 일주일 전에 걸었던 적이 있다면 기묘한 기시감을 느낄 수도 있고요. 이처럼 우연과 우연은 새로운 상상력을 부추기는 화학 작용을 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인물 중심의 복잡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영화와 달리, 평면 프레임 속에 굳어버린 한 장의 사진에서 우린 독자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영화 세계 속 스토리텔링의 구속에서 벗어난 박찬욱은 단출한 사진을 통해 관객이 직접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는 우연한 기회를 만들어 주는지도 모릅니다.
영화로 이어진
우연한 장면들
『아가씨 가까이』
“다만 풍경이라면 정찰하면서 찾았고, 인물이라면 매복해서 기다렸다.”
_박찬욱, 『아가씨 가까이』
영화 <아가씨>에서 배우 김민희가 연기한 히데코 역을 그려내는 데, 박찬욱이 예전에 촬영했던 흰털 고양이의 모습이 결정적이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처럼 그가 담아낸 사진 속 우연한 장면은 종종 영화로 이어질 때가 있죠. 동네를 걷다가, 혹은 영화 촬영 현장과 해외 출장지에서 포착한 수많은 이미지가 영화의 미장센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영화와 사진이라는 서로 다른 활동은 결국 ‘박찬욱’이라는 한 인물이 추구하는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로테스크하고 유머러스하며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둔다는 닮은 점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한편 박찬욱은 풍경과 배우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풍경은 좋은 빛을 만나는 순간에 능동적으로 빛을 내고, 배우들 역시 평소에는 웅크리고 있다가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서 도약하곤 하죠. 이는 <아가씨>의 촬영 현장에서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 『아가씨 가까이』에서 드러납니다. 아무리 대배우라도 그가 주인공인 촬영 현장에서는 흔하게 목격되는 존재일 텐데요. 박찬욱은 카메라 프레임 바깥에서 배우들의 ‘어딘가 붕 떠 있는’ 상태를 포착하기 위해 기다렸다가 셔터를 누릅니다. <아가씨>를 만들기 위해 온통 영화 생각뿐이었던 당시 그의 카메라에 맺힌 상은 모두 아가씨 가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헤어질 결심을』
“일산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주유소에 잠깐 내려서 찍었다. 이 구름에서 찾아낸 핑크와 보라색이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 파도에서 발견한 핑크와 보라색을 예고한다.”
_박찬욱, 『어떻게 헤어질 결심을』
2018년 12월 24일, 2년여에 걸쳐 런던에서 TV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 작업을 마무리한 이튿날에 박찬욱은 마게이트라는 바닷가 마을로 향합니다. 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한국인 형사와 중국인 용의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사 멜로극의 단초가 자리 잡은 상태였죠. 때마침 하늘과 바다의 파란 표면 위로 노란 햇빛이 드리웁니다. 황급히 스마트폰에 바다를 담던 그는 자신의 다음 영화가 끝나는 장소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연히 마주한 낯선 바다와 햇빛, 하늘에서 영화 <헤어질 결심>이 시작됨과 동시에 끝났던 건 아닐까요.
최근 박찬욱의 포토 에세이 『어떻게 헤어질 결심을』이 출간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헤어질 결심>이 완성되기까지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직접 촬영한 사진과 특유의 유머러스한 코멘터리가 덧붙은 작품입니다. 영화 제작 현장 속 배우들의 모습과, 어떻게 헤어질 결심을 만들까 고민하며 영화 바깥에서 박찬욱이 촬영한 사물과 풍경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죠. 각본집과 스토리보드 북, 스틸컷을 모은 포토 북에 이어 이번 포토 에세이 역시 <헤어질 결심>을 더 깊고 넓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합니다.
사진작가 박찬욱은 세상 모든 존재에게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아주 우연히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놀라운 순간을 만날 때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곧 외출할 때 카메라를 챙길 수 있도록, 뻔하고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장면을 건져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일상에 만연한 아름다움과 마주치는 찰나, 주저 없이 셔터를 누를 수 있는 결심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 박찬욱, 아가씨 가까이, 그책, 2016
- 박찬욱, 너의 표정, 을유문화사, 2021
- 국제갤러리, 너의 표정(Your Faces) Introduction, 2021
- 노블레스, 박찬욱이 포착한 순간(2021.10.4)
- 에스콰이어, 우연의 세계(2021.10)
- 박찬욱, 어떻게 헤어질 결심을, 을유문화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