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카피copy

비난할 수만은 없는
카피의 복잡한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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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다 카피야.” 한 번쯤은 이 힐난조의 문장을 말해보거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베꼈는지는 명백하다. 대부분의 대중적인 패션 브랜드가,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디자인을 모방해서 내놓았다는 뜻이다. 심지어 제품을 사서 뜯어보고 카피한 후, 다시 봉제해서 환불한다는 괴담까지 들어보았다. ‘카피’라는 말엔 부족한 독창성을 탓하고 허락 없는 도용이라는 비난이 내포되어 있다. 또, 알면서도 카피된 제품을 구입한다는 자조적인 의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피를 도용의 맥락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과연 비난할 만한 것인가? 카피에는 복잡한 속 사정이 있다.


확산은 패션의 본질이다

이전 글 “패션이 권력을 재생산하는 방법”과 “패션이 권력에 저항하는 방법”에서 패션의 권력이 흐르는 구조를 살펴본 적이 있다. 두 개의 글에 걸쳐, 상향 전파(Trickle-Up)과 하향 전파(Trickle-Down)를 설명했다. “하향 전파”는 하위그룹이 상위의 럭셔리 패션 브랜드를 모방함으로써 위에서 아래로 유행이 퍼진다는 뜻이고, “상향 전파”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에서 하위문화와 같은 새로운 문화를 차용할 때 아래에서 위로 유행이 퍼진다는 뜻이다. 패션에는 상향과 하향, 심지어 비슷한 집단에서 서로 모방하는 수평적인 전파(Trickle-Across)까지 모두 나타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방향이 아니라, ‘확산’ 그 자체다. 확산은 패션의 본질이다. 패션의 정의를 살펴보면, ‘특정한 시기에 유행하는 복식이나 두발의 일정한 형식’으로, ‘유행’해야 비로소 패션이 될 수 있다. 다수가 주목하고 동의해야 패션이 가능한 것이다. 확산되지 않으면 의복에 그칠 뿐이다. 이것은 패션이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유행의 확산은 대량의 수요를 포함하고, 이는 상업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질 리포베스키는 “패션이 확산하는 그 핵심에는 모방이 있다”고 말했다. 다수가 소수를 모방함으로써 패션이 확산되는 것이다. 누군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내면, 새로운 변화를 일찍이 알아차린 소수가 이를 모방하고,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모방하면서 퍼지는 것이 바로 패션의 형성 과정이다. 아래 그림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패션의 주기(Fashion Cycle)를 나타낸 것이다. 패션은 언제나 새롭게 탄생하고, 확산되며,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탄생과 확산 사이에는 항상 모방이 있다. 카피는 패션의 특징으로 인해 나타나는 독특한 관습인 것이다.

패션 주기 그래프
패션 주기 그래프, 이미지 출처: GoldnFiber

창조는 모방으로 지속된다

대량생산이 활성화되기 이전에도 카피는 횡행했다. 1950년대 프랑스에는 60%의 여성이 재단사를 통해 매장이나 패션 잡지의 스타일을 본떠 입었다고 한다(리포베스키). 지금은 대량생산 시스템의 발달 덕분에, 직접 재단사를 찾지 않아도 다양한 브랜드에서 합리적인 가격의 트렌디한 제품을 내놓아준다. 여기서 패션의 두 가지 성질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모방은 피할 수 없다. 둘째, 모방의 대상, 즉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는 대상이 있다.

이는 밴드웨건 효과(bandwagon effect)와 스놉 효과(snob effect)로 설명할 수 있다. 밴드웨건 효과는 편승 효과라고도 불리는데, 다수의 트렌드에 편승하고 싶은 욕구를 설명한다. 스놉 효과는 백로 효과라고도 불리며, 백로처럼 홀로 도드라지고 싶은 욕구를 설명한다. 보통 트렌드를 앞서나가는 그룹에 해당되는데, 이들은 다수가 모방하기 시작하면 즉시 새로운 트렌드를 찾아내면서 다수와 구별되고자 한다. 패션은 닮고자 하는 그룹과 분리되고자 하는 그룹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다.

즉, 누군가는 모방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더 독창적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SPA 브랜드의 카피로 인해 럭셔리 패션 브랜드는 계속해서 새로운 디자인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패션은 카피를 허용함으로써 끊임없이 창조해야 하는 순환의 구조 위에 서있다. 카피는 패션의 연속적인 창조를 유도하는 연료이며, 패션은 카피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패션에서 창조란, 모방으로 인해 ‘지속’되는 것이다.

똑같은 옷 입은 마네킹
이미지 출처: unsplash

사회적 메시지도
‘카피’될 수 있을까

카피의 정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까. 보통 ‘카피’라고 하면,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제품을 다른 보통의 패션 브랜드가 모방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는 항상 선도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경제적 가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타 브랜드와 소비자들은 이 브랜드들이 선점한 ‘트렌드 세터(trend setter)’의 위치를 열망하는 것이다. 모두가 이 브랜드들을 트렌드의 선도자로 인정하기 때문에, 결국 이들이 패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은 모든 측면에서 앞장서야 한다. 트렌드에 대한 권력도, 경제적 가치도, 모두 상류에 존재해야 하며, 다수가 열광하고 우러러보는 특징을 가져야 한다. 당연히, 사회적 논의에 대해서도 앞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디올이 ‘We should all be feminist’란 슬로건을 걸었고, 버버리도 무지개색 체크 프린트를 선보였다. 패션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일 수 있는 이유는 대중의 요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패션의 확산 시스템은 사회적 논의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필자는 국내 브랜드에서 그 가능성을 봤다. 스파오는 2021년 다양한 형태의 몸을 옹호하는 바디 포지티브 캠페인 ‘에브리, 바디’를 진행했고, 지그재그는 배우 윤여정을 모델로 쓰면서 다양한 연령을 포용했다. 미쏘는 올해 3월 8일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다양한 분야의 여성 8인이 전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국내 브랜드도 조금씩 사회적 논의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며, 패션이 만들어가는 메시지 또한 카피되고 확산됨을 느낀다. 패션의 카피는 고루한 관습에서 벗어나, 이 시대에 중요한 대화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활용하자.

스파오 ‘에브리, 바디’ 캠페인 사진
스파오 ‘에브리, 바디’ 캠페인 사진. 이미지 출처: 무신사 뉴스

우리는 이제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가치만 모방하려 애쓰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로 자기 PR이 민주화된 시대가 아닌가. 우리가 소셜 미디어에서 열광하는 대상은 자신의 특별한 매력이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이 시대의 인플루언서는 에이블리와 구찌를 넘나들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패션 브랜드의 가치에 편승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아마 이 시대의 카피는 가치와 메시지를 옮기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요해지는 세상으로 점차 나아가길 바라본다.

  • 유니야 카와무라, 패셔놀로지, 사회평론아카데미, 2022
  • 질 리포베스키, 패션의 제국, 문예출판사, 1999
  • Caroline Young, FashionQuake, Frances Lincoln, 2022
  • Yoko Katagiri. (2022). Economic Theories of Fashion. In E. Paulicelli, V. Manlow, & E. Wissinger (Eds.), The Routledge Companion to Fashion Studies. (pp. 49-56). New York : Routledge
  • 뉴스탭, 샌드박스X치도X스파오, 바디포지티브 캠페인 ‘에브리, 바디’ 전개(20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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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량

패션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보였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포용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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