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가 세계에 퍼지는 모습은 흐뭇하고 자랑스럽다. 그중 케이팝(K-POP)의 전 세계적인 유행은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단한 성취다. 그런데 케이팝을 과연 우리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케이팝이 범지구적인 장르가 되어가는 만큼 우리나라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고 싶은데, 과연 케이팝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외칠 수 있을까? 케이팝이 케이팝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케이팝을 우리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케이팝의 수많은 성과 중 가장 신기했던 소식은 게임 ‘리그오브레전드’를 운영하는 라이엇게임즈에서 케이팝 그룹 ‘K/DA’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게임사에서 케이팝을 기반으로 가상 아이돌 그룹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케이팝의 글로벌한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K/DA를 둘러싼 논란은 케이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K/DA와 케이팝을 둘러싼 논란은 2020년 11월에 발표된 ‘MORE’이라는 곡에서 출발했다. 주된 비판은 이 곡이 K/DA가 지닌 케이팝 그룹의 정체성을 흔들었다는 것이었다. 세라핀이라는 중국계 객원 멤버가 그룹의 센터로 등장했다는 점, 그리고 세라핀의 보컬 파트를 중국인이 맡았고, 중국어 가사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팬들의 반발이 거셌다. K/DA는 케이팝 그룹인데, 중국인이 중심이 되어 중국어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케이팝의 본질을 헤치는 일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세라핀의 국적과 언어를 문제시한 것은 대부분 한국 팬들이고, 해외 팬들은 한국 팬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즉, 세라핀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는 케이팝에 대해 한국인이 인지하는 정체성을 중국이 건드렸기 때문이지만, 해외 팬들에게 가닿지 않은 이유는 한국인이 주장하는 케이팝의 본질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케이팝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케이팝의 정의는 무엇인가?
케이팝은 한국의 대중음악을 의미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한 댄스음악을 가리킨다. 음악적 뼈대는 서구 대중음악을 수용한 것에서부터 출발하였으며, 따라서 록, 힙합, EDM 등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한국인과 한국어로 구성된 팝이라는 단순한 명제로는 케이팝의 정체성을 굳힐 수 없다.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는 해외 국적을 지닌 아티스트들도 많고, 외국 작곡가가 만든 음악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방탄소년단의 ‘Dynamite’는 영어 가사로만 구성되어 있고, 최근에는 한국 연예기획사에서 필리핀의 현지인들로 아이돌 그룹을 구성하여 배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케이팝의 범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음악적 특징은 서구 대중음악이 기반인데, 어떻게 한국의 대중음악이라는 지역적 특징을 주장할 수 있을까? 케이팝에 대해 한국이 가지는 고유성은 무엇인가?
케이팝의 고유한 특징
케이팝에 내재한 한국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케이팝에 한국적 정체성은 전혀 없고, 오직 서구의 대중음악을 수용하고 서구에 진출하기 위해 제작된 서구 중심의 음악이라 설명한다. 혹자는 케이팝을 생산하는 시스템에 주목한다. 영미 팝과 달리 케이팝은 생산과 유통 시스템을 총괄하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된다는 것이다. 혹자는 케이팝에 우리 경제 문화적 배경이 충분히 녹아들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보았을 때, 케이팝만의 독특한 특징은 아래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시각적 퍼포먼스 강조
첫째, 케이팝 곡에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리듬을 기반으로 화려한 댄스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케이팝의 실질적 정의가 아이돌 그룹의 댄스음악이라는 점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이 케이팝의 특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특히 케이팝 아티스트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춤을 연습한다는 점에서 춤이 가지는 중요성이 매우 크다. 둘째, 아이돌 그룹에는 외모와 체형 등 엄격한 미적 기준이 강요된다. 이를 기반으로 아이돌 그룹의 무대는 아티스트의 스타일링과 메이크업 등 비주얼 요소를 부각하며,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즉, 케이팝 아티스트의 스타성은 시각적 이미지에 치중된 경향이 있다.
2) 그룹 활동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강한 서구 국가에 비해 케이팝은 집단주의적 문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케이팝의 아이돌은 여러 명이 모여 그룹을 형성하고, 함께 활동하며, 보컬이나 댄서 등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또한 여러 명의 동작이 정확히 일치하는 이른바 ‘칼군무’가 케이팝의 눈에 띄는 특징인데, 통일된 움직임을 통해 완전한 하나가 되는 집단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이돌 산업은 팀 프로젝트에 익숙한 집단주의적 정서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집단의 성공을 위해 개인의 과도한 성실함을 강요했다는 측면에서도 경제성장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위해 성실성을 강조해온 한국의 노동 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3) 기업 중심의 관리 시스템
케이팝은 대형 연예기획사를 주축으로 발전한 상업적 음악이다. 특히, 한국의 연예기획사는 오랜 트레이닝을 통해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교육하고 보호하는 연습생 시스템을 형성하여 아티스트의 음악적 역량부터 인성까지 종합적으로 관리해왔다. 기획사 대표를 중심으로 가족 같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특징이며, 대표가 요구하는 규칙과 목표를 따르는 가부장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또한 연예기획사의 주도하에 작곡가와 프로듀서, 안무가를 비롯해 컨셉 기획자, 앨범 제작자, 영상 제작자, 스타일리스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협업하여 최종 작품을 생산한다.
케이팝의 음악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
케이팝은 한국이 가진 미적 역량과 성실성, 집단성 이 모든 게 어우러져 나온 결과물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자체로 한국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음악’이라 정의하기엔 한국과 연결할 만한 음악적 정체성이 부실하다. 록, 힙합, 일렉트로닉 등 케이팝의 음악 장르는 대부분 영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았고, 단순한 리듬과 반복적인 멜로디를 통해 중독성을 일으키는 후크송이 특징이라는 의견도 특별한 정체성을 이루진 않는다. 케이팝의 음악적 특성이나 방향성에는 한국의 대중음악이라고 명시할 만한 뚜렷한 실체가 없다.
타국의 문화를 차용하고, 그래서 문화적 전유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의 문화에 주목하고 활용방안을 고민하기보다 국외의 문화에 주목하고 쉽게 사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다. 물론, 가야금 선율이 흐르는 빅스의 ‘도원경’이나 방탄소년단이 보여주었던 탈춤, 곡 ‘대취타’ 등 조금씩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눈길을 던지고 있지만, 케이팝의 정체성과 연결될 수 있을 만큼의 조직적인 고민이 수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힙합은 미국 흑인 문화의 정체성이자 구심점이 되어주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담은 음악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서구 대중음악의 형식을 띠고 있는 케이팝? 아니면, 정통성만은 분명하지만 대체로 외면받는 국악? 우리는 우리의 음악으로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 케이팝에 민족성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케이팝의 ‘K’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케이팝에 우리의 고유한 음악적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점은 문화 확산의 방향이 국가 권력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서구의 권력으로 서구 문화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한국적 정체성을 지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은 서구 문화를 동경하고, 전통은 고루했을 테니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국가였다면, 전 세계를 제패하는 음악은 국악이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서구 문화의 권력 속에서 우리의 것을 기억하고 지키고 이어가기 위한 것은 약소국의 슬픈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서구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케이팝의 성과는 매우 유의미하다. 다만, 여기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확실하게 내세울 수 있다면 케이팝의 의미가 더 뚜렷해질 수 있지 않을까.
- 김수정, 김수아, 「’집단적 도덕주의’ 에토스: 혼종적 케이팝의 한국적 문화정체성」 언론과 사회 제23권 제3호, 2015
- 이수완, 「케이팝(K-Pop), Korean과 Pop Music의 기묘한 만남: K-Pop의 한국 대중음악적 진정성에 대한 탐구」 인문논총 제73권 제1호, 2016
- 김영대, “케이팝 세계화의 새로운 국면”, 한류NOW, 2022